전기톱 든 '90세 소녀' 김윤신, 마침내 그를 알아본 세계적 화랑들

입력 2024-01-29 11:29   수정 2024-03-20 22:19



'1세대 여성 조각가' 김윤신(89·사진)은 1963년 말 파리 유학길에 올랐다. 타지에서 가장 낯설었던 것은 언어도 음식도 아닌 현지의 여성 예술가들이었다. 기본적인 조소 양식을 따라가기도 벅찼던 그와 달리, 파리의 여성들은 이미 구성과 추상을 오가며 이름을 알리고 있었다.

6·25전쟁 직후 모두가 힘들었던 시절의 얘기다. 현실은 특히 대학을 막 졸업한 여성들한테 팍팍했다. '먹고 살기도 힘든데, 여자가 무슨 예술이냐'는 주변의 눈총도 받았다. 하지만 파리에서 세계적인 여성 예술가들의 활약상을 목도한 그의 열정을 막을 수 없었다.

한국에 돌아온 김윤신은 1970년대부터 '기원쌓기' 연작을 내놨다. 조각난 나무를 솟대처럼 쌓아 올린 작품들이다. 옛사람들이 안녕을 기도하며 만든 서낭당 돌무더기와 비슷한 형태다. 그는 나무토막을 쌓으며 간절히 빌었다.

"그래, 난 세계적인 작가가 될 거야. 그리고 미술사에 내 이름을 기록하고 싶어."



20대 김윤신의 '기원'이 90세를 목전에 두고 현실로 이뤄졌다. 지난 17일 그는 국제갤러리·리만머핀과 공동 소속 계약을 맺었다. 상업 갤러리로부터 '러브콜'을 받은 건 이번이 처음이다.

김윤신은 최근 한국경제신문과의 전화 인터뷰에서 "국제적인 화랑 두 곳과 동시에 계약을 맺게 돼 영광스럽다"며 "여느 세계적인 작가들처럼 '김윤신' 하면 떠오를 만한 좋은 작품들을 세상에 남기고 싶다"고 했다.

지난 40여년간 아르헨티나를 기반으로 활동했던 김윤신은 지난해 서울시립미술관 남서울미술관 개인전을 계기로 두 갤러리와 인연을 맺게 됐다. "생애 마지막 여행이라고 생각하고 찾았는데, 내게 이런 큰 기회가 주어질 줄은 상상도 못 했어. 앞으로 하고 싶은 거 원 없이 할거야. 하하."

구순을 앞둔 나이에도 김윤신은 매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전기톱을 들고 나무를 깎는다. 무거운 목재를 손수 나르는 일이 쉽지 않을 테지만, 젊어서부터 일상처럼 해온 작업이라 지칠 줄 모른다고 했다.

"최근엔 '삼발이' 하나를 구해서 많이 편해졌어. 줄을 묶어두고 세우고 눕힐 수 있어서 전혀 힘들다고 생각하지 않아."



국제갤러리·리만머핀과 계약을 맺게 된 것도 이러한 꾸준함의 결과다. 1984년 아르헨티나로 넘어간 이유도 도처에 널린 아름드리나무에 반해서였다. 전시를 열고 싶었지만, 현지에 연고가 없던 그는 직접 부에노스아이레스 현대미술관 문을 두드렸다. 좋은 재료가 있다는 소식이 들리면 멕시코와 브라질 등으로 무대를 옮기기도 했다.

김윤신을 상징하는 '기원쌓기' 연작은 어릴 적 기억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1935년 강원도 원산에서 태어난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때 가족과 뿔뿔이 흩어졌다. 독립운동을 하던 오빠 김국주는 행방이 묘연했다. 설상가상으로 목단강에 오가며 활동하던 한의사 아버지와도 6·25전쟁 이후 소식이 끊겼다.

"엄마는 새벽마다 장독대 옆에 정화수를 떠 놓고 기도하셨어. 내가 돌을 주워다 쌓으면, 엄마는 초를 하나 세워두시곤 한 30분은 두 손 모아 빌었지. 그땐 너무 어려서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었는데 이제는 알 것 같아. 가족이 물리적으로 만나지 못해도, 하나 된 정신에서라도 만나길 염원하셨던 게 아니었을까…."



전쟁 직후 값비싼 원목을 구하는 건 '하늘의 별 따기'였다. 1977년부터는 재건축 때 사용된 기둥과 서까래를 얻어 썼다. 하지만 이렇게 제멋대로 생긴 목재는 오히려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됐다. 나무껍질과 속살이 엉켜있는 목재의 모습에서 '합이합일 분이분일' 연작을 착안했다. 서로 다른 두 개가 하나가 되고 다시 이들이 각각 나뉜다는 의미로, 노령의 작가가 깨우친 인생의 본질이기도 하다.



김윤신의 작품은 세월의 풍파를 맞으며 단련된 정신만큼이나 단단하다. 나무뿐 아니라 다이아몬드만큼의 경도를 자랑하는 '오닉스'도 그의 작품의 단골 소재다. "'산꼭대기에서 굴러도 깨지지 않는 재료로 하겠다'는 마음으로 좋은 재료를 찾아다녔어. 내 작품들이 오래 남아서 기억되길 바라는 마음에 그랬지. 공들인 작품이 금방 없어지면 아쉽지 않나."

국제적 갤러리들과 손잡으며 '인생 2막'을 시작한 지금, 앞으로의 '기원'을 묻자 이런 대답을 들려줬다. "요새는 나무에 색과 그림을 입힌 '회화 조각'에 꽂혔어. 어릴 적 가지고 놀던 집 울타리 수수 나무에서 아이디어를 얻었지. 최근 5년 사이 관련해서 여러 실험적인 시도를 해봤는데, 앞으로는 이 분야를 더 구체화하고 싶어." 작품을 설명하는 그의 목소리는 소녀처럼 들뜬 모습이었다.



안시욱 기자 siook95@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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